예술의전당 3월29일~5월13일 전시
조선 후기 단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그를 흠모하며 따랐다.
언제나 ‘화합’ ‘평화’를 사랑한 백의정승 명재 윤증. 오늘날 우리 정치권에 새로운 귀감이 될 명재 윤증전이 개최될 예정으로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예술의전당은 오는 29일부터 5월 13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명재 윤증>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핵심 인물이자 소론의 영수(領袖)인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 - 1714)의 유물을 통하여 그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선보이는 전시이다.
86년의 삶에서 단 한번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지만
소론의 영수로 추앙된 백의정승 명재 윤증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 - 1714)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산림으로,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았다.
그는 8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학문적, 인격적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지방에 거주하며 권력과 거리를 두었던 그를 두고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조선 19대왕 숙종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윤증에게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정치사에서 윤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치열한 논쟁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언제나 화합과 평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명재 종가에서 간직한 보물 제1495호
<윤증 초상>과 <영당기적>
이번 전시에는 <윤증 초상>과 <영당기적> 두 점의 보물이 전시될 예정이다.
윤증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초상 5점과 초상 제작관리 내력이 상세히 적힌 <영당기적>은 2006년 보물 제1495호로 일괄 지정됐다.
이번 전시에는 이명기가 1788년에 구법으로 그린 초상이 <영당기적>과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윤증의 초상은 생전에 변량이라는 화가가 처음 그린 후 윤증 사후 장경주, 이명기, 이한철 등에 의해 제작됐다.
조선의 명문가 3대에 걸쳐 시호를 받다
경종이 내린 윤증 <시호 교지>
명재 윤증의 집안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46명이나 배출할 만큼 명문가였다. 그의 집안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이 9명이며, 특히 윤증(문성공)은 조부인 문정공 윤황(尹煌, 1571 - 1639), 아버지 문경공 윤선거(尹宣擧, 1610 - 1669)와 함께 3대에 걸쳐 시호를 받기도 했다.
비록 윤증은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의 학문과 교육은 전국의 선비들을 매료시켰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시호 교지>는 1723년 조선의 20대왕 경종이 윤증에게 내린 것이다.
명필 3형제 윤증의 글씨를 낳다
명재 윤증의 집안은 명문가이면서도 명필(名筆)가였다. 그의 큰아버지인 동토 윤순거(童土 尹舜擧, 1596 - 1668)는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초서로 쓴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는 보물 제1671호로 지정되어있기도 하다. 또한 큰아버지 윤문거, 아버지 윤선거 역시 글씨가 뛰어나 삼형제의 글씨를 모은 <노성3선생필적>에는 박세당, 박세채 등 당대 이름난 인물들이 발문을 쓰기도 했다.
윤증 역시 가문의 영향으로 빼어난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다. <명재 친필 주자시>, <명재 친필 8폭병풍> 등의 작품을 통해 윤증의 경쾌한 초서를 감상할 수 있다.
노론과 소론 분화의 시작
윤증, 송시열 그리고 <신유의서>
조선 후기 서인이 정권을 잡은 후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보인 노론과 온건한 입장의 소론으로 분화됐다.
한 때 스승과 제자 관계였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 - 1689)과 명재 윤증은 각각 노론과 소론의 영수가 되어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윤증은 송시열이 윤휴(尹鑴, 1617 - 1680) 등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자 이를 비판하기 위해 송시열에게 보낼 <신유의서>를 작성했다.
윤휴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오랜 벗이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윤증과 송시열의 이러한 갈등을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르며, 노론과 소론의 분당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윤증과 선비들의 편지
조선 문인들의 대화를 엿보다
윤증은 조선 후기 존경받는 대학자였던 만큼 동시대 인물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윤증이 주변 인물들과 주고받은 간찰들은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송시열, 김장생, 윤휴, 박세당, 허목 등 당대 최고학자들의 친필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간찰 자료도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명재 종가와 확당가에 전하는 유물을 중심으로 총 4가지 주제로 구성되며, 1섹션에서는 윤증 선생의 친필, 문집, 초상 등을 중심으로 명재의 삶을 이야기한다.
2섹션에서는 윤증 선생의 가계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을 조명하며, 3섹션에서는 당시 윤증 선생과 교유하던 학자 및 문하생들의 친필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4섹션에서는 조선후기 윤증 선생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조선 후기 단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그를 흠모하며 따랐다.
언제나 ‘화합’ ‘평화’를 사랑한 백의정승 명재 윤증. 오늘날 우리 정치권에 새로운 귀감이 될 명재 윤증전이 개최될 예정으로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예술의전당은 오는 29일부터 5월 13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명재 윤증>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핵심 인물이자 소론의 영수(領袖)인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 - 1714)의 유물을 통하여 그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선보이는 전시이다.
86년의 삶에서 단 한번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지만
소론의 영수로 추앙된 백의정승 명재 윤증
▲ 윤증 초상 (이명기 본 구법) (1788) |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 - 1714)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산림으로,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았다.
그는 8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학문적, 인격적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지방에 거주하며 권력과 거리를 두었던 그를 두고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조선 19대왕 숙종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윤증에게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정치사에서 윤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치열한 논쟁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언제나 화합과 평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명재 종가에서 간직한 보물 제1495호
<윤증 초상>과 <영당기적>
▲ 영당기적 (작자 미상, 1885년) |
이번 전시에는 <윤증 초상>과 <영당기적> 두 점의 보물이 전시될 예정이다.
윤증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초상 5점과 초상 제작관리 내력이 상세히 적힌 <영당기적>은 2006년 보물 제1495호로 일괄 지정됐다.
이번 전시에는 이명기가 1788년에 구법으로 그린 초상이 <영당기적>과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윤증의 초상은 생전에 변량이라는 화가가 처음 그린 후 윤증 사후 장경주, 이명기, 이한철 등에 의해 제작됐다.
조선의 명문가 3대에 걸쳐 시호를 받다
경종이 내린 윤증 <시호 교지>
명재 윤증의 집안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46명이나 배출할 만큼 명문가였다. 그의 집안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이 9명이며, 특히 윤증(문성공)은 조부인 문정공 윤황(尹煌, 1571 - 1639), 아버지 문경공 윤선거(尹宣擧, 1610 - 1669)와 함께 3대에 걸쳐 시호를 받기도 했다.
비록 윤증은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의 학문과 교육은 전국의 선비들을 매료시켰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시호 교지>는 1723년 조선의 20대왕 경종이 윤증에게 내린 것이다.
명필 3형제 윤증의 글씨를 낳다
▲ 명재 윤증 친필 주자시 (연도미상) |
명재 윤증의 집안은 명문가이면서도 명필(名筆)가였다. 그의 큰아버지인 동토 윤순거(童土 尹舜擧, 1596 - 1668)는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초서로 쓴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는 보물 제1671호로 지정되어있기도 하다. 또한 큰아버지 윤문거, 아버지 윤선거 역시 글씨가 뛰어나 삼형제의 글씨를 모은 <노성3선생필적>에는 박세당, 박세채 등 당대 이름난 인물들이 발문을 쓰기도 했다.
윤증 역시 가문의 영향으로 빼어난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다. <명재 친필 주자시>, <명재 친필 8폭병풍> 등의 작품을 통해 윤증의 경쾌한 초서를 감상할 수 있다.
노론과 소론 분화의 시작
윤증, 송시열 그리고 <신유의서>
조선 후기 서인이 정권을 잡은 후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보인 노론과 온건한 입장의 소론으로 분화됐다.
한 때 스승과 제자 관계였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 - 1689)과 명재 윤증은 각각 노론과 소론의 영수가 되어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윤증은 송시열이 윤휴(尹鑴, 1617 - 1680) 등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자 이를 비판하기 위해 송시열에게 보낼 <신유의서>를 작성했다.
윤휴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오랜 벗이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윤증과 송시열의 이러한 갈등을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르며, 노론과 소론의 분당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 명재 윤증 친필 절명시 (1714) |
윤증과 선비들의 편지
조선 문인들의 대화를 엿보다
윤증은 조선 후기 존경받는 대학자였던 만큼 동시대 인물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윤증이 주변 인물들과 주고받은 간찰들은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송시열, 김장생, 윤휴, 박세당, 허목 등 당대 최고학자들의 친필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간찰 자료도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명재 종가와 확당가에 전하는 유물을 중심으로 총 4가지 주제로 구성되며, 1섹션에서는 윤증 선생의 친필, 문집, 초상 등을 중심으로 명재의 삶을 이야기한다.
2섹션에서는 윤증 선생의 가계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을 조명하며, 3섹션에서는 당시 윤증 선생과 교유하던 학자 및 문하생들의 친필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4섹션에서는 조선후기 윤증 선생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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