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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금융인맥④] 3·4공때 내각이 경제정책 주도… ‘모피아’ 등장

막강한 힘의 원천은 규제에 바탕한 ‘관치 금융’

임권택 기자 | 기사입력 2018/01/23 [10:09]

[한국의 금융인맥④] 3·4공때 내각이 경제정책 주도… ‘모피아’ 등장

막강한 힘의 원천은 규제에 바탕한 ‘관치 금융’

임권택 기자 | 입력 : 2018/01/23 [10:09]

[파이낸셜신문=임권택 기자] 박정희 정권시절인 60~70년대에는 경제정책의 주도권은 전반기에는 경제기획원, 후반기에는 재무부를 중심으로 한 내각이었다.

 

60년대에는 경제기획원이 주도권을 잡았다면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금융을 손에 죈 70년대에 들어서는 재무부가 주도권을 가져갔다.

 

3공 초기 경제기획원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전에는 이렇다 할 경제개발 구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주도권을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71년 11월 20일 금융인의 자세확립과 금융윤리의 새신을 다짐하는 금융인대회가 농협중앙회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김종필 국무총리, 남덕우 재무장관, 서일교 총무처장관,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 등이 참석했다.  

 

당시 경제기획원 신설은 한국경제에 있어 중요한 한 획이다. 경제기획원(EPB)은 설립당시 종합기획국, 예산국, 통계국, 물동기획국 등 4국19과 228명을 거느린 국가주도 경제개발의 핵심부처였다.

 

경제기획원의 힘은 막강했다. 예산권과 편성권을 쥐고 경제개발의 종합적인 그림을 그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때 탄생한 것이 1962년 제1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계획의 일환으로 그해 울산공업단지가 조성된다.

 

경제개발시대에 있어 경제개발 방향은 경제기획원이 그리고 재무부는 세정과 금융을 틀어쥐고 경제개발을 실행에 옮겼다.

 

60~70년대의 한국 경제정책은 고도성장에 초점이 맞춰졌다. 5·16 군사혁명으로 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내세운 정치목표도 ‘빈곤타파’였다.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전제하에 정부는 외자도입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세계4위 부채국이라는 오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기 경제기획원을 신설했지만 경제발전에 대한 학문적 밑바탕이 없어 방향이 혼선을 빚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서강학파이다. 이른바 서강대 교수들로 남덕우 전 부총리, 이승윤 전 부총리, 김만제 전 부총리, 김병국 전 대우경제연구소고문 등이 있다.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들은 대부분 성장론을 내세워 서강학파하면 곧 성장론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남덕우씨의 경우 한국은행에서 재직하다가 1960년에 미국 오클라호마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64년에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승윤씨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후 미국 미주리대 및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64년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만제씨는 53년 경북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덴버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64년에는 미주리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돌아와 65년 서강대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유학파들인 이들의 성향은 성장론에 바탕을 둔 경제이론을 주창했다. 현실 참여의식도 강했다.

 

특히 남덕우씨나 김만제씨의 경우 박대통령이 추구하던 성장위주의 경제발전론에 부합한 이론을 내세워 주목을 받았다.

 

서강대교수들 중 가장 먼저 관료로 들어선 인물은 남덕우씨였다. 그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1971년) 기본 골격을 마련하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후 1969년에 남덕우씨는 재무장관을 임명되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박 대통령과 김성곤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다.

 

그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최장수 재무장관으로 재임했으며 그해 부총리에 임명, 1978년까지 한국 경제정책수립의 핵심역할을 한다.

 

이에 앞서 요즘 말하는 경제수석의 효시가 탄생한다. 경제수석은 대통령의 참모로서 업무가 명확하게 규정된 게 없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의 신임여부에 따라 경제대통령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의 경제개인교사에 불과하다.

 

대통령 집무실 문고리를 열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난다. 다름 아닌 ‘쓰루’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김학렬 당시 경제1수석이다. 그는 이후 승진하여 21대 재무부장관(1966.9. ~ 1966.12.), 10대 경제기획원장관(1969.6. ~ 1972.1.)으로 재임하는 등 3공경제의 실력자로 굳힌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2월 황종률 재무장관과 김영휘 산업은행 총재에게 당시 한국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갈수 있는 부실기업처리를 정비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따라 법령이 정비가 되고 그해 5월13일 대통령 특명으로 청와대 비서실에 외자관리비서실이 신설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외자관리실 총책임을 김학렬 수석비서관에게 맡긴다. 그리고 담당비서관 겸 부실기업정리반장에는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이던 장덕진씨가 맡았다. 부실기업 정리중 금융권에 주목을 받은 사례는 최성모씨에게 신동아손해보험과 대한생명이 넘어간 사례이다.

 

▲  1968년 10월 제1회 금융인체육대회

 

한편, 1982년 3월 31일 서울 중구 회현동 무역회관에서는 재무부 출신 모임인 ‘재우회(財友會)’ 발족식이 열려 눈길을 끌었다.

 

시중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전직 재무관료들은 친목모임체를 구성한 것이다. 이날 남덕우 전 재무부 장관을 비롯한 전직 장관들, 시중은행장, 금융공기업 사장 등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던 200여 명의 재무부 출신 인사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지 회자되고 있는 ‘모피아’(재무부의 영문표기 이니셜인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라는 조어가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지는 사건이다.

 

모피아들의 막강한 힘의 원천은 금융당국이 틀어쥐고 있는 규제에 바탕한 ‘관치 금융’이다. 1960~70년대 경제개발시대에는 정부가 금융을 직접 통제했다. 부족한 자본을 배분하는 것은 정부나 핵심 권력이었으며 이를 집행하는 것은 금융관료이다.

 

따라서 금융을 실제적으로 지배한 재무부 이재국은 서울대, 경기고 출신들의 아성이었다. 이재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부서가 아니다.

 

어떤 재무장관은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이재국과 국제금융국 사무관들을 서로 이동시켰다. 자기가 사무관시절 이재국에 가고 싶었으나 경기고를 나오지 않아 갈수가 없었다는게 후일담이다.

 

모피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1세대 인물들은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1974.9. ~ 1978.12)과 장덕진 전 이재국장이다. 김 전 장관은 1966년 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차관보, 차관 등 승진가도를 달렸고, 장 전 장관은 이재국장, 차관보, 경제기획원 차관 등을 역임했다.

 

언론에선 보통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모피아 인맥의 대부로 지칭하는데, 이헌재를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시켜 준 것도 김용환씨이다.

 

따라서 모피아를 말할 때 김용환씨, 장덕진씨, 이헌재씨 거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업은 김용환 재무부 장관 취임 이후 재무부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김 전 장관은 취임 직후 한은 은행감독원에 대기업 대출 규제를 총괄하는 여신관리국을 신설하고 재무부 이재국 출신을 국장에 앉혔다.

 

재무부가 은행감독원을 통해 금융권과 대기업의 자금줄을 틀어쥐기 시작한 것이다.김용환 장관은 40대 초반이던 1974년부터 4년 동안 재무부 장관을 맡아 정부 주도의 고도성장 경제 개발 정책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덕진씨의 파워는 대단했다. 그가 은행과장으로 있을 때 금융단축구대회 참석했을때 시중은행장이 도열을 해 맞은 일화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라는 막강한 파워가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가 축구를 좋아하여 이재국 직원들은 밤샘 야근하고 아침에 조기축구를 하여 우의를 다지고 그런 끈끈한 인맥이 모피아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이재국장 시절에는 12개 국책은행과 시중은행들이 축구단을 창설할 정도이다.

 

그 전초전으로 1968년 10월 제1회 금융인체육대회를 개최했으며 이듬해 1월 상업은행 축구단의 창단을 시작으로 3월 주택은행, 조흥은행, 제일은행, 외환은행, 산업은행, 신탁은행의 창단과 함께 금융단축구협의회를 결성하고 실업축구와는 독자적인 금융단 축구리그를 시행됐다.

 

당시 이재국장은 은행, 보험, 증권, 금고 등 모든 금융기관의 인사와 경영에 관한 책임자였다.

 

따라서 금융기관의 대출 한도와 대출 금리를 정하며,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 업무는 기본인 셈이다. 은행장들은 이재국장이 호출하면 언제든지 즉각 달려 올 정도로 위세는 대단하다.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은행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기 이다.

 

1970년 대한축구협회장에 임명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장 회장의 축구사랑은 남다르다. 그가 한국 축구발전에 남다른 족적을 남겼으며 지금도 그때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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