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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금융인맥➁] 자유당 정부시절 은행은 정권의 시녀

경성고상·일본유학파 은행 요직 독차지…서울상대 우수 졸업생 입행이 관례

임권택 기자 | 기사입력 2018/01/08 [16:34]

[한국의 금융인맥➁] 자유당 정부시절 은행은 정권의 시녀

경성고상·일본유학파 은행 요직 독차지…서울상대 우수 졸업생 입행이 관례

임권택 기자 | 입력 : 2018/01/08 [16:34]

[파이낸셜신문=임권택 기자] 해방이후 한국의 금융계는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인 적산(敵産)을 처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당시 금융계의 최대 관심사는 일제 강점기에 중앙은행 격이었던 조선은행과 현 한국산업은행 전신인 조선식산은행 그리고 조흥은행이 중앙은행 자리를 놓고 경쟁을 했다. 

 

결국 조선은행이 1950년 6월12일 한국은행으로 태어나 오늘에 이르렀다.

 

▲  조선은행이 1950년 6월12일 한국은행으로 다시 때어났다. (사진=임권택 기자)

 

대한민국 금융사에서 시중은행들이 재벌에게 지배당한 것은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7년부터 61년 5·16 쿠데타 직후까지 단 4년뿐이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은행주식을 환수하여 정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를 ‘귀속주’라 하는 데 이 귀속주를 은행의 민영화라는 정책과제를 단행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1957년 3월 입찰을 통해 은행이 재벌에게 넘어갔다.

 

4대 시중은행 중 흥업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이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넘어 갔다.

 

삼성의 ‘호암자전’에서 이병철 회장은 “대주주 입장을 이용하여 임의로 금융기관을 운영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시중은행주를 매수하게 된 것은 이 나라 금융의 근대화를 기필코 실현하자는 일념에서 였다”고 말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서 은행 대출은 대부분 자유당 선거자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선거자금을 약속해야 대출이 가능했던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벌어졌다.

 

당시의 실세로 최근에까지도 낮설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자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상공은행 출신으로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적산으로 안양에 섬유회사인 금성방직을 설립하는 등 실세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미국의 원조달러 지원, 정권과의 유착으로 부를 쌓았으며 516 이후에도 공화당 거물 정치인으로서 일생을 풍미하게 된다.

 

또 한분은 시중은행 중 정치권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은 정재호씨가 지배하는 제일은행이었다. 정재호씨는 1960년 이기호 제일은행장을 앞세워 온갖 선거자금을 제일은행을 통해 조달했지만 결국 구속됐다. 이기호 은행장은 이기붕씨의 6촌동생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산업은행 융자는 ‘가만(可晩)’ 사인쪽지가 유일한 금고열쇠였고 담보였다. 감사 등 대출문제가 불거지면 이 쪽지만 보여주면 그만 이었다.

 

이승만 정부 당시 은행 대출액 중 30%는 선거자금으로 떼어주는게 관례였다. 이러한 불법을 통해 은행계가 정치자금을 만드는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선거자금에 동원된 금융계 인사들을 보면 송인상 재무장관,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 김영찬 산업은행 총재, 구용서 산업은행 총재, 김영휘·배제인 한국은행 부총재 등이 동원됐다.

 

이들은 4·19후 선거자금 조달 관련 재판에서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았으나 5·16이후 대부분 풀려나 계속 활동을 했다.

 

▲  해방이후 한국의 금융계는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인 적산(敵産)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중요한 임무였다.(사진=임권택 기자)

 

당시의 금융계 단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유당 정권에서 가장 황당한 사건은 1956년 이승만대통령 ‘탄신 80주년 대출금’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국무원은 탄신경축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이기붕씨을 추대했다.

 

위원회는 전국극장연합회를 조직, 관람객에게 관람료를 부담하여 자금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축하금 3억환을 마련하는데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위원장인 이기붕을 채무자로 해서 4개 시중은행에서 미리 대출을 받아 쓴 것이다.

 

나중에 일부대출금은 상환했으나 나머지는 흐지부지 되어 고스란히 은행 부실채권으로 남은 황당한 사건이다.

 

일제 강점기나 해방 직후에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에 우수한 두뇌가 몰렸고 이들이 초기 한국 금융을 움직이는 인맥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에는 금융기관이 다른 직장에 비해 대우가 월등히 좋았기 때문에 인재가 몰렸다. 경성고상(서울 상대 전신), 서울대 문리대, 법대출신 들은 졸업하면 입행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50년대 말에는 서울상대 졸업생 중 상위 20명은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에 입행하는 게 관례였을 정도다.

 

특히 경제기획원 발족 당시 한국은행과 산업은행 조사부 직원들이 파견 나가 부처 설립업무를 맡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가 은행에 많았다.

 

1950년대를 이끌어간 금융인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어떤 분이 금융수장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김유택 전 부총리는 경성고상을 졸업하고 잠시 금융조합 이사로 재직하다가 일본 규우슈제대에서 수학한 뒤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이후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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